곰단지, 단순하게 좋아 / 이것저것 담긴 블로그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시오노 나나미는 사실 역사 학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역사소설가입니다.

그녀가 저술한 책은 소설답게 허구적 내용이 책 읽는 재미를 더하지만, 독자에겐 소설이 아니라 역사서로 읽힌다는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클로버 필드, REC 등의 영화가 극적 사실감 부여를 위해 다큐멘터리 기법을 도입해서 크게 성공했다면,

역사소설 계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저술 방식이나 행태가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도 소설적 허구를 적극 빌려,

기존 역사서의 따분함을 물리쳤다는 데 있겠지요. 하지만 진짜 역사를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는 주류사학계에선 분통 터질 일입니다. 로마인이야기의 로마사와 전쟁 3부작의 로마사를 실제 로마사로 이해하고 있는 대중의 확산은 기존 로마사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심어 주기에 충분합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동로마제국(비잔틴)에 지나치리만큼 냉정한 평가를 하기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동로마사가 이토록 큰 인기를 얻고, 터키 이스탄불이 과거 동로마제국의 영광이었던 콘스탄티노플로서 재조명받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시오노 나나미 덕분이 아닐까 싶네요. (제가 전쟁 3부작 콘스탄티노플 함락 편을 읽고 터키 배낭여행을 떠났던 것만 보더라도)

 

 

킹덤 오브 헤븐은 시오노 나나미가 망가트려 놓은 중세 십자군 원정에 대한 오해와 불편한 진실을 말끔히 없앱니다.

더 나아가선 21세기 할리우드 영화가 이슬람교 문화권에 대해 취했던 오만불손한 태도 역시 일거에 무너트렸습니다.

한 국가의 패망을 그린 작품은 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더군다나 4대 종교(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아르메니아 정교)의 성지라고 일컬어지는 예루살렘 왕국의 패망이라면 더더욱.

비록 소수민족인 쿠르드족 출신이지만 전 이슬람 문화권을 통틀어 성군이라 일컫는 살라딘의 정세를 읽는 눈과 지휘 능력은 이 영화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평화적 관계가 결코 요원한 일이 아닐 거라는 메시지와 함께.

어느 한 쪽에 편향된 시각은 애당초 이 작품에선 찾을 수 없습니다. 패자가 승자가 될 수 있고, 승자가 패자가 될 수 있는, 그래서 절대적 승자가 없는 십자군 원정 시대의 치열했던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차분한 시선으로 리들리 스콧은 봅니다.

 

로마사에 대한 흥행에 불을 지폈다는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 역시 칭찬받을 만합니다. (적어도 소설이란 점을 작가 스스로 명시했으니까요. 거짓을 실제처럼 포장하고 나몰라라하는 한비야씨와는 다르다고나 할까요)

참고로 킹덤오브헤븐은 3시간 짜리 감독판으로 볼 것을 권장합니다. 송두리째 잘려나간 45분이 명작과 범작을 가른 경계가 될 줄이야 극장 개봉 당시 누가 알았으려나요.